꿈꾸는노란장미 2009. 7. 25. 11:38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어 그 내용의 농도가 진해진다.

 

 짧은 시간에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눈을 통하여 인생의 다양한 면을 맛볼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으면서 침통한 비극을 체험할 수도 있다. 문학은 작가의 인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을 통하여 숭고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의 친구다. 같은 높은 생각을 가져볼 수도 있고 순진한 정서를 같이할 수도 있다. 외우畏友치옹痴翁의 말같이 상실했던 자기의 본성을 되찾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그 동안만이라도 저속한 현실에서 해방되어 승화된 감정을 갖게 된다.

 

 사상이나 표현 기교에는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으나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情이다. 그 속에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자연적인 슬픔, 상실, 고통"을 달래 주는 연민의 정이 흐르고 있다. 

 

 가문의 자랑도 권세의 호강도

 미美와 부富가 가져다 준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피지 못할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榮華의 길은 무덤으로만 뻗어 있다.

 

 대양大洋의 어둡고 깊은 동굴은

 순결하고 맑은 보석을 지나고

 많은 꽃들이 숨어서 피었다가는

 그 향기를 황야荒野바람에 날려 버린다.

 

 토머스 그레이의 이 <촌락 묘지村落 墓地에서 쓴 만가輓歌>는 얼마나  소박한 농부들의 심금을 울리고 얼마나 많은 위안을 주어 왔을까. 영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이 시는 또 얼마나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해 왔을까. 어떤 학자의 말같이 같은 언어로 엘리지를 배우면서 자란 영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의 적과 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어떠한 운명이 오는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에디슨이 그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시구는 긴 세월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을 씻어 주었을까.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오동은 천 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이 2행의 시구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많은 선비에게 긍지와 위안을 주어 왔을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정의 극치는 아무래도 연정戀情이라 하겠다.

 

 다른 이들 나의 임 되어 오다

 더 굳은 맹세를 저버림이라

 허나 내 죽음을 들여다볼 때

 잠의 높은 고개를 올라갈 때

 술에 취했을 때

 갑자기 너의 얼굴 마주친다.

 

W.B.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배반을 당했다. '유럽의 미인'이란 예찬을 받는 재기발랄하고 용감한 여자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이츠에게 사랑을 주어 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른 사람이란 애란愛蘭 독립 운동 투사인 한 젊은 장교였다. 예이츠가 그 편지의 겉봉을 찢을 때 그의 생애는 두 도막 났다고 한다.

 황진이. 그는 모두 곤보다도 더 멋진 여성이요, 탁월한 시인이었다. 나의 구원의 여성이기도 하다. 그는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진이는 여기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다시 그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킨다.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이,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이 일원화되어 있다. 그 정서의 애틋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수법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154수 중에도 이에 따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어느 문학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豊裕하게 하여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耘谷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白樺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바이런의 소네트가 아니라면 쉬옹의  감옥監獄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요, 수십 년 전에 내가 크레인의 시 <다리[橋]>를 읽지 않았던들 작년에 본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가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보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개는 그렇게 좋아해도 고양이는 싫어하였다. 그러던 내가 이장희의 시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은 뒤로는 고양이에게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얼마 전 《신한국문학전집》에서 지용의 <향수鄕愁>를 반갑게 다시 보고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 재가 식은 지로하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돋아 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 사실 나는 질화로가 하나 갖고 싶어서 지금 구하는 중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블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 상이다.

 

 <향수>에 이어 생각나는 노천명의 <고향>.

 

 언제는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늘타리 따는 길머리에

 학림사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어라.

 

 장연長淵이 고향인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혼이 있어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리라.

 

 <무도회舞蹈會의 수첩手帖>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직 미모를 잃지 않은 중년 부인이 그가 처녀 시절에 가졌던 수첩 속에서 거기에 적혀있는 이름들을 발견한다. 그가 춤을 약속했던 파트너들, 여인은 그이름들을 찾아 한가한 여행을 떠난다. 지금 나는 그런 순례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