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물이 초췌하여 가끔 부대접을 받는 일이 있다. 호텔 문지기한테 모욕을 당한 일까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소학교 시절에 여름이면 파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로 빨아 다린 것을 입는 날이면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두루마기가 구겨지고 풀이 죽기 시작하면 나의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중학 시절에는 '고꾸라' 교복 한 벌, 그리고 여름 '시모후리' 한 벌을 가지고 2년 동안을 입었다. 겨울 교복 바지는 때에 절어서 윤이 나고, 호떡을 먹다 꿀이 무릎에 배어서 비 오시는 날이면 거기가 끈적끈적하였다. 저고리의 호크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교복을 사서 처음부터 채우지 않고 입던 터이라 목이 자란 뒤에는 선생님이 아무리 야단을 치셔도 잠그려야 잠글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교복을 입고 아무 데를 가도 몸과 마음이 편하였다. 내가 상해로 유학을 갈 때에도 이런 교복을 입고 갔었다. 돈이 있다고 해도 호텔에서 들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사지 양복을 맞춰 입고 헌 교목은 '알라뚱시(넝마주이)'에게 동전 열두 닢을 받고 팔아 버렸다. 그 사지 양복은 입은 지 몇 달 후에야 내 옷 같아져서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근년 미국 가는 길에 동경에 들러 한 친구를 만났더니, 그는 나를 보고 미국 가거든 옷 좀 낫게 입고 다니라고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그래 보스턴에 도착하자 나는 좋은 양복을 사 입어 보려고하였다. 그러나 여러 백화점을 돌아다녀 보아도 좋은 감으로 만든 기성복으로는 내게 맞는 것이 하나도없었다. 맞춰 입을까 했더니 공전이 놀랄 만큼 비쌌다. 그 후 와이셔츠 소매 기장을 줄이느라고 옷값 이상의공전을 지불한 적이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싸구려를 한 벌 사 입었다. 저고리 소매가 길어서 좀 거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었다.
또 내 옷을 바라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여자들은 여자들끼리만 서로 옷을 바라다보는 모양이었다. 귀국한 지 3년, 공전값싼 한국에서도 소매를 못 줄이고 그 양복을 그대로 입고 다닌다. 다행히 우리나라 여성도 내 옷을 보는 이는 하나도 없다.
가슴을 펴고 배를 내밀고 걸어 보라고 일러 주는 친구가 있다. 옷차림도 변변치 않은데다가 작은 키를 구부리고 다니는 것이 보기에 딱한 모양이다. 그래 나는 어떤 교장 선생님같이 작은 몸을 자빠질 듯이 뒤로 젖히고 팔을 저으며 걸어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걸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몸시 힘드는 일이었다. 잘난 것도 없는 나이니 그저 구부리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빨리 하여 위엄이 없다고 알려 주는 친구가 있다. 그래 나는 명성이 높은 어떤 분이 회석會席에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끔벅끔벅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 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이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여 나는 그 노릇은 다시 안 하기로 하였다.
어린아이같이 웃기를 잘하여 점잖지 않다는 것은 또 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래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성난 얼굴을 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서영이가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뭄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나는 얼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잘생기지도못한 얼굴이 사나워 보인다. 나는 씽긋 웃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위해 그날 하루 종일 서영이하고 구슬치기를 하였다.
요즘 나는 점잔을 빼는 학계 '권위'나 사회적 '거물'을 보면, 그를 불쌍히 여거 그의 어렸을 적 모습을 상상하여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그의 허위의 탈 눈은 눈같이 스러지고 생글생글 웃는 장난꾸러기로 다시 환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