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부친 편지
지난 토요일 오후, 오래간만에 비원秘苑에 갔었습니다.
비를 거어 주던 느티나무 아래, 그 돌 위에 앉았었습니다.
카페 테라스에서 오래오래 차를 마시며 그랑 불바르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고 있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러다가 나는 신록이 밝은 오월의 정원을 다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섰다가는 다시 걸었습니다.
콩코드에서 에트왈르를 향하여 샹젤리제를 걷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대가 말한 그 아름다운 종소리들이 울려 옵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영원한 애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대와 같은 외로운 나그네를 위하여 서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밤 열한 시, 그곳은 오후 세 시쯤 될 것입니다.
이 순간에 그대는 화실 캔버스 앞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튀울르리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브르 박물관에 계실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프린트로 보여 드린 세잔의 정물화 <파란 화병> 앞에 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란 화병에 파란 참푸꽃, 그것들이 파란색 배경에 배치되어 있지마는, 마치 보색補色에 놓여 있는 것같이 또렷하게 도드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세련된 "컬러리스트"입니다.
헤어지면 멀어진다는 그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녹음이 짙어 가듯 그리운 그대여, 주고 가신 화병에는 장미 두 송이기가 무서운 빛깔로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엄격한 거부로써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입니다.
한 주일이 그리 멀더니 일 년이 다가옵니다. 가실 때 그렇게 우거졌던 녹음 위에 단풍이 지고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더니, 이제 라일락이 자리를 물러서며 신록이 짙어 갑니다. 젊음 같은 신록이 나날이 원숙해집니다.
둘이서 걸으면 걸을 만하다시던 서울 거리를 혼자서 걷기도 합니다. 파리는 철이 늦다지요. 그래도 지금은 마로니에가 한창이겠습니다.
걸음걸음 파아란 보랏빛 그대의 치맛자락, 똑같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나 같은 모자는 만날 수 없다는 파리, 거기서도 당신의 의상은 한이채일 것입니다. 파리의 하늘은 변하기 쉽다지요, 여자의 마음 같다고. 그러나 구름이 비치는 것은 물의 표면이지 호수의 깊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날이 흐리면 머리에 빗질 아니하실 것이 걱정되오나, 신록같은 그 모습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2009년 03월 21일 밤 10시 18분 옮겨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