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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로 본 결혼관

꿈꾸는노란장미 2009. 10. 4. 16:44

아버지의 질서와 교환대상으로서의 여성

 

결혼제도,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일처제의 기원은 개인의 사랑 또는 성욕과 무관하다. 일부일처제의 역사 속에서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사랑이나 자발적인 결혼의사가 중요한 요소로 생각된 것은 한세기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동시대에도 "사랑하니까 결혼합니다."라는 말의 이면에 사랑 외의 요소가 얼마나 많이 적용되고 있는가.)

 본래 일부일처제는 한 남성이 사유재산을 독점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결혼제도이다. 또한 일부일처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성-남자다운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여성성-여성이 제공하는 섹스-을 이용하기 가장 좋은 방식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영웅이 미녀를 얻었고 지금은 재벌이 미녀를 얻는다는 말이다.

 

베르니니(Bernini) [페르세포네의 납치] 1621-1622

 

위의 조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 한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거인족을 추방하고 세상을 나누어 지배하기로 했는데 제우스는 인간들이 사는 지상을, 포세이돈은 광대한 바다를, 그리고 하데스는 지하의 저승세계를 다스리기로 했다. 헌데 간만에 지상으로 나온 저승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발견하고 그녀를 지하세계로 납치해버렸다.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납치당하는 페르세포네의 공포에 찬 표정에서 묘한 에로티시즘이 느껴진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하데스의 손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의 품에서 발버둥칠수록 아름다운 나신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여성을 납치하는 이야기는 고전미술에서 흔히 사용했던 소재인데 이에 관해 궁금하시다면 [SM in Art] 시리즈의 [겁탈과 폭력]을 읽어주시라.)

 

그런데 산 채로 저승문을 넘게된 페르세포네가 누구냐하면 바로 곡물과 땅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딸이었던 것이다. 여신은 딸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으나 땅 속으로 꺼진 딸을 땅 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겠나. 데메테르 여신은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대지를 저주했다. "배은망덕한 땅아, 나는 너를 비옥하게 하고 풀과 곡식으로 덮어주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러한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여신의 저주를 받은 땅은 메말라버렸고 가축이 죽어났으며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다급해진 쪽은 제우스였다. 그는 형제인 하데스를 결혼시키기 위해 그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도록 내버려두었으나 이제는 그의 통치영역인 지상이 위태로워질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충실한 헤르메스를 지옥으로 보내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에레보스-암흑-의 여왕으로 지내면서 하데스가 준 석류를 먹고 말았고 완벽한 구출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타협안으로 페르세포네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세 계절을 보내고 겨울이 되면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겨울이 되어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떠나면 데메테르의 슬픔으로 땅이 메말라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라이톤(leighton) [페르세포네의 귀환]

 

이 결혼은 지상을 지배하는 제우스와 지하를 지배하는 하데스의 분배관계에서 페르세포네의 처녀성이 교환되는 과정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가부장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에서 한 여성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남성의 충동적인 성애로 인한 약탈은 핑계에 불과하다. 많은 원시문명권의 사례에서 약탈혼은 상호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약탈되는 여성과 약탈하는 남성 사이의 합의가 아니다. 딸-뿐 아니라 모든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그 소유권을 다른 남성에게 양도하는 것이 일부일처제의 기원이었다. 현대에도 서양식의 결혼에는 이런 풍속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한 뒤에 신랑에게 인도되고 신랑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부의 면사포를 벗길 자격을 가지게 된다.

 

여성의 처녀성은 이런 거래에서 중요한 환금가치를 지닌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사랑이 아닌 사회적 인습 위에 구축된 것이고 여기에는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이 경제적인 조건의 중심에는 남성이 있고 여성은 그저 교환의 대상에 불과한다. 사유재산의 발생으로 생긴 잉여 생산물을 상속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이 분명한 자손을 생산해 줄 여성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부일처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오직 한 사람의 상대와 섹스한다는 원칙-은 언제나 여성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낭만적인 사랑의 탄생

 

그렇다면 아버지의 질서를 거역하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난 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스 신화 속에서 찾아보자.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이었다. 크레타의 왕비였던 파시파에는 무척 정력적인 여성이었는데 인간으로는 부족했는지 황소와 관계를 맺고 수태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소의 몸뚱이에 인간의 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르스, 미노스는 아들을 교묘한 미궁에 가두어버렸다.

 

당시 크레타의 속국이었던 아테네 사람들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그중 가장 가혹했던 것은 인신조공으로 매년 일곱명의 소년소녀를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밥으로 바쳐야 했다. 아테네의 후계자였던 테세우스는 아테네 국민들을 구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미노타우로스의 굴에 가겠다고 자원했다.

 

아테네의 테세우스 왕자는 제물이 될 다른 소년소녀들과 함께 크레타의 왕 앞에 서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테세우스를 본 왕녀 아리아드네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살리기 위해 칼과 실타래를 주었다. 실마리를 얻은 테세우스는 칼로 괴물을 찌르고 실타래를 더듬어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왔다.

 

로맨스에서 사랑은 가장 이성적인 정신착란 상태로 묘사되기에 아리아드네 역시 아버지의 나라를 저버리는 일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동왕자에게 눈이 멀어 자명고를 찢어버린 낙랑의 공주도 이와 비슷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 죽일 놈의 사랑을 어쩔텐가, 결국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따라 아테네로 떠난다.

 

그러나 테세우스 일행은 낙소스 섬에 아리아드네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덕분에 미노타우로스의 굴에서 빠져나왔지만 위기가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시나리오는 우리나라 아침드라마에도 자주 나온다. 고생고생 뒷바라지 해서 남편이 성공하도록 내조했으나 성공한 이 남자 바람났네,하는 스토리 말이다. 바람이라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사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말이다. 여튼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떠나면서 아테나 여신이 꿈에 나타나서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말을 남긴다.

 

아리아드네는 배은망덕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망연자실 낙소스 섬에서 울고 있었는데 이를 불쌍하게 여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나서 뒷수습을 해주었다. 여신은 인간의 애인 대신 신의 애인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디오니소스를 낙소스 섬으로 인도했다.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디오니소스는 그녀를 위로하며 아내로 삼았다. 아버지의 규칙을 어긴 아리아드네는 버림받았지만 다시 구원자를 만난 셈이다.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의 미로를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규칙을 알고 있는 동시에 아버지의 통치 하에 있는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그곳을 탈출할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어떤 남성이 필요하며 한 남성-테세우스-과의 미친 사랑을 통해서만 아버지로부터 떠날 수 있다. 후에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았을 때 아리아드네에게는 또다른 남성이 필요했고 그녀는 결국 디오니소스를 통해 구원받았다.

 

티치아노(Tiziano)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1523-1524

 

결혼의 여러가지 형태와 여성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연애결혼의 이상과 환상을 보여준다. 서양의 로맨스는 기사도 문학에서 출발했는데 초기 기사도 문학에서 귀부인과 기사의 사랑은 성애와 무관한 정신적인 사랑으로 묘사되었다.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과 섹스가 결부된 이야기가 유행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 초기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이 잉여자본에 기생하며 형성된 절대왕정 시대의 일이다.

 

분가루 날리는 애증으로 충만했던 로코코 시대에도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문제였다. 연애와 결혼이 동일시된 것은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부르주아 문화가 형성된 이후에나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춘향과 이몽룡이 신분을 초월해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결국 결혼했대요,하는 이야기가 유행했던 시기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였다. 그리고 이런 연애결혼의 이상과 환상이 현실에 적용된 시기는 훨씬 뒤였다.

 

결혼의 형태와 남녀의 관계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다음 편에는 이에 이어 부르주아 사회의 성장에 따른 결혼의 모습의 변화와 현대사회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21세기 한국의 여성들을 갈구는 결혼의 압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결론은 다음 시간에 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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