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셋째날, 우수리스크/ 발해성터

꿈꾸는노란장미 2017. 9. 3. 13:43


/발해성터 
 
우리가 해동성국으로 기억하는 발해, 이 번 여행이 발해민족의 뱃길을 따라 시작되기에 설레었던 나는 발해성터 방문에 기대감을 잔뜩 안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 동안 나즈막한 언덕을 올라 걸어 도착하였는데 기대했던 성곽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멀리 수이푼강이 흐르고 그 주변이 성터였다고 가이드는 짧게 설명해주었다.
발해성곽이 토성이었기에 그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당시 외성은 전체 길이가 8㎞가 넘고 성벽은 3∼5m에 이르며 산의 절벽은 방어시설로, 강(수이푼강)을 자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도록 축조됐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나라,
발해가 있었던 성터를 바라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하였다.
당시 발해의 민족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발해성터를 보기 위해 나즈막한 언덕을 오르는 중


멀리 보이는 솔빈강 주변이 발해성터.


무심히 피어있는 싸리꽃.




#이하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옴.

발해성터 부근의 기왓장

발해지도


 
※ 발해에 대하여... 
 
698년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동만주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당은 705년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처음 발해의 영토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 많았다.
따라서 발해는 영토를 넓히려 애썼고, 그 결과 고구려의 옛 땅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과 현재 러시아의 영토인 연해주까지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번성하면서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게 되자 당나라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발해는 거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지니면서 발해만의 연호를 쓰는 자주적인 나라로서 연호는 해에 붙이는 이름으로 인물의 탄생이나 나라의 왕이 왕위에 오른 해에 이름을 붙여 시간을 나타내어 발해는 나라가 세워진 초기부터 당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자주적인 나라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음과 비교하였을 때 발해가 얼마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발달시키고자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발해가 영토확장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721년 강릉 이북에 장성을 쌓아 대비하였고 732~733년에 발해와 당·신라의 긴장관계가 계속되었으나 문왕의 평화외교로 해소되었다.
문왕은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여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하여 818년 선왕은 말갈세력,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선왕 이후 점차 쇠퇴를 보이다가 9세기 후반부터 성장한 거란은 925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멸망하게 되었다.
#참고: 해동성국 발해/교육부& Daum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