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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 /琴兒 인연 ▦

전화

  웬 전화가 다 있느냐고? 지금보다도 교통이 더 나쁘던 때 당인리로 나를 찾아왔던 제자들이 내가 없어 허탕을 치는 일이 있었다. 그 후 그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놓아주려고 동창들간에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당황한 나는 급히 가설비를 마련하고 어떤 분의 호의로 전화를 놓게 되었다. 우리 집 전화는 매우 한가하다. 하루에 두서너 번 또는 대여섯 번 전화가 오고 그만한 횟수의 전화를 걸게 된다. 내가 거는 전화나 내게 오는 전화는 "지금 눈이 오고 있습니다" 하는 그런 전화다 실리적 목적이 있는 전화라면 의사 친구를 괴롭게 하는 전화 진찰 정도다.

 

 오늘도 신경통에 대하여 문의를 하였다. 그런데 아직 주사를 맞을 생각은 없다.

 

 전화가 주는 혜택은 받으면서 전화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팬아메리칸 여객기를 타고 앉아서 기계 문명을 저주하는 바라문 승려와 같은 사람이다. 물론 전화는 성가실 때가 많다. 한밤에 걸려오는 전화, 목욕할 때 걸려오는 전화,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들어 있을 때 걸려오는 전화, 게다가 그것이 잘못 걸려오는 전화라면 화가 아니 날 수 없다. 그러나 그 화는 금방 가신다. 불쾌한 상대가 아니라면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그다지 짜증나는 일은 아니다. 한번은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참으로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하는 신선한 웃음소리는 갑자기 젊음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이 이름 모르는 여성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 싶다.

 

 갖은 괴로움을 견디면서도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의 하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사람 이외에는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살면 언제나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전화를 가짐은 불현듯 통사정을 하고 싶으 ㄴ때, 목소리라도 들어 보고 싶을 때, 이런 때를 위해서다.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전선電線이 아니라도 情의 흐름은 언제 어느 데서고 닿을 수 있지마는.

 

 

==================2009년 03월 15일 저녁 10시 01분에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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