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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 /琴兒 인연 ▦

기행소품記行小品 07.09.18 16:17

1. 어떤 학료學寮의 '론'

 

 승원같이 고요한 옥스퍼드 대학 한 칼리지[學寮]의  중정中庭에 론이 깔려 있었다. 이 론은 이 칼리지 지도 교사만이 밟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없는 뜰이었다. 카펫보다 산뜻한 잔디위를 밟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어렸을 때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아래 좌우에 나란히 서 있는 품석品石 중 정1품 옆에 서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이제 학자의 특권을 범하는 것은 죄스러운 것 같아 론을 바라다만 보았다. 수도승같이 칼리지 담 안에서 살며 임금에게도 대출을 허가하지 않는 책들을 향유하며 천하의 영재들을 가르치며 그 론을 밟을 수 있는 혜택을 나는 부러워하였다. 론은 자유와 한가의 상징이다.  

 

 지도 학생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독서 이외에는 아무 일에도 쫓기지 않는 한가를 의미한다.

 

 까만 가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고 하얀 얼굴에 눈이 빛나는 대학생이 지나간다. 그날이 시험일이므로 용기를 복돋기 위하여 빨간 카네이션을 단 것이다.

 

 잔디 없는 교정에서 나는 '베이리올' 칼리지의 '론'을 생각한다.

 

 

 2. 아름다운 여인상

 

 안기려는 포즈의 여인상, 조각가는 자기의 작품을 포옹하고 있다.

 

 그리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프랑스 화가의 이 그림에는 '피그말리온과 그의 조각상'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피그말리온의 여인상은 처음부터 포옹의 자세로 제작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긴 세월을 두고 수시로 오래오래 안겨 왔기에 자연히 여인의 두 팔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들리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안으로 휘어 포옹의 포즈를 취하게 되지 않았나 한다.

 

 아마 화가 제롬도 나 같은 상상을 하면서 그 그림을 그렸을 거다. 차디찬 대리석, 그러나 배반하지 않는 여인.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의 프린트 한 장을 사려고 하였다. 내 방 위에 붙여 놓고 가끔 바라다보려는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 그림의 프린트는 없었다.

 

 

  3. 낙엽

 

 "나무들 다 가을빛 지니고 樹樹皆秋色"

 "나무들 가을의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고"

 하나는 당나라 왕적王積의 시구요, 다음은 예이츠의 것이다. 나라와 연대는 서로 멀리 달라도 시심詩心은 하나요 간결한 표현 또한 비슷하다. 이들과 같이 나도 단풍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즘 낙엽이 마음에 더 사무친다.

 

 한 잎, 한 잎, 대여섯 잎, 떨어지다가 바람이 불면, 잎이 잘 아니 보이도록 쏟아져 내리는 낙엽, 누른, 붉은, 갈색진 핼쑥한 잎들이 셸리의 <서풍부西風賦>를 연상케 하는 낙엽.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이이하리오." 황진이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휘날려 다니는 낙엽들이 내 뺨에 부딪힌다. 예전 내 얼굴을 스치면 그 머리카락.

 

 이제 기억은 세잔이 즐겨 그리던 그 헐벗은 나무들 같다.

 

 코트 깃을 세우고 발목까지 덮이는 낙엽을 소리내며 11월 오후를 걷는다. 한 마리 새도 없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더니 다람쥐 한 마리가 마른 이파리가 더러 붙은 나무 위로 올라 간다. 잇달아 또 한 마리가 재빨리 올라간다. 인기척에 놀라서인가, 그저 저희끼리 노는 버릇이겠지. 얼마 아니 있으면 첫눈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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