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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 /琴兒 인연 ▦

치옹痴翁

 가세가 기울어 그는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의정부에 가서 말단 직업을 얻었다. 밤이면 송강松江과 노계蘆溪를 읽고 연암燕巖을 숭앙하였다. 현대 중국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성탄聖嘆과 노신魯迅을 좋아하였다. 동양 철학에 정진하여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老子><장자莊子>도 탐독하였다.

 

 해방 후 그는 교원이 되었다.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얻기 쉽던 대학 졸업장 하나 왜 못 구했겠는가. 그 흔한 교수 자리 하나 왜 못 얻었겠는가. 아깝기도 하다. 긴 세월을 두고 축적하여 온 그 해박하고 정확한 지식, 그 예리한 분석력, 높은 안목, 그리고 그 달변으로 정말 누구보다 못지 않은 명강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만족하였다. 30년 간 보성고교에 있었고, 자격증 문제로 학원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3년 전에 은퇴하였다. 그는 일생을 밑지고만 살아왔다.

 

  "가난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그의 말대로 살아왔다. 굶지 않고 차라도 마실 수 있는 가난이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한 칸 방이라도 겨울에 춥지만 않으면 되고 방 안에 있는 '센티멘털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물건들을 사랑하며 그는 살아왔다. 그는 단칸방 안에 한 우주를 갖고 있다. 그는 불운을 원망하는 일이 없고 인정미에 감사하며 늘 행복에 겨워서라고 한다.

 

 그는 정情으로 사는 사람이다. 서리같이 찬 그의 이성이 정에 용해되면서 살아왔다. 세속과의 타협이 아니라 정에 용해되면서 살아왔다. 때로는 격류 같다가도 대개로 그의 심경은 호수 같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자기를 '치졸' 하다고도 하고,  '비겁' 하다고도 한다. 그것은 위선도 아니요, 허위도 아니다.

 

 치옹의 근본 사상은 유교다. 그는 삼강오륜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다. 고故 조지훈趙芝薰 선생을 가리켜 마지막 선비라고 부른 이가 있었다. 치옹은 지훈 이후에도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고 미래에도 있을 선비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고희가 다 된 노학자이지만 때에 있어서는 젊은이보다 오히려 더 현대적이다. "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김은 세대의 차가 아니라 늙기 전의 나를 잃음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 문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이다.

 

 "벽을 부숴라. 드높은 창공이 얼마나 시원하리."

 

 윤오영이 중학 1학년 때 학생 문예란에 발표하였던 시구다. 선자였던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선생은 그의 시 3편을 극구 칭찬하였다. 그는 소년 시절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후 40년 간 글을 별로 쓰지도 않고 한 번도 내놓지도 않았다. 1959년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厠上樂>을 처음 발표하고, 1972년 <수필문학>이 창간된 이래 주로 이 전문지에 경이적 수량의 걸작들을 계속 써 냈다. 대기만성이란 말은 그를 두고 있는 말인가 한다. 나는 그를 보고 "치옹이 5년 전에 죽었더라면 큰일날 뻔했소" 하고 농담을 한 일이 있다.

 

 근래 그와 나는 자주 만났다. 갑자기 전화를 걸고 '귀거래'나 덕수궁에서 만나자고 한다. 마음에 드는 글이 씌어진 것이다. 그는 집안 살림살이 같은 잡담을 하다가 좀 계면쩍은 웃음을 웃으면서 안 호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낸다. 그는 이때 가장 생의 환희를 느끼는 것같이 보였다. 한 뭉텅이 꺼내 놓는 수도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읽어 주기 시작한다. 신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민망할 정도의 큰 소리로 폭포수같이 읽어 내려간다. 소심한 내가 참다 못해 '가만 가만'을 연발해도 그는 들은 체도 아니한다. 다 읽고 나서 정말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이대로 주어도 될까?" 물론, 대개가 일품이다.

 

 그의 수필의 소재는 다양하다. 그는 무슨 제목을 주어도 글다운 글을 단시간에 써 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하나 보다.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이 그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그가 타고난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 그리고 그 기억력의 산물이다.

 

 옥같이 고루 다듬어진 수필들이 참으로 많고 만다. <염소> <비원秘苑의 가을> <찰밥> <달밤> <소녀> <소창素窓> <봄> <방망이 깎던 노인> <산> <생활의 정情> <아적我的 독서론> 등은 그 중에서도 걸작들이다.

 

 금강석같이 빛나는 대목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염소>라는 수필에,

 "··· 그리고 주인이 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은 주인 옆에 온순하게 충실히 기다리고 서 있듯, 그리고 길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 두면 다투어 푸른 잎을 뜯어먹듯, 그리고 다시 끌고 가면 먹던 것을 놓고 총총히 따라가듯."

 

 또 문득 유원悠遠한 영접을 느끼게 하는 <비원의 가을>의 절구絶句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또 "조약돌 같은 인생. 다시 조약돌을 손에 쥐고 만져 본다. 부드럽고 매끄럽다. 옥도 아닌 것을 구슬도 아닌 것을, 그러나 옥이면 별것이요 구슬이면 별것이냐. 곱고 깨끗한 것이 부드럽게 내 손에 쥐어지면 그것이 곧 옥이요 구슬이지."

 

 그의 수필에서 우리는 전통 문화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향수를 느낀다. 그 글에는 작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음미吟味가 있고 종종 현실을 암시하는 경구驚句가 있다. 감격적이고 때로는 감상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제할 줄을 안다.

 

 

==================2009년 02월 08일 오후 5:38분에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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