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나는 당신을 형이라고 불러 본 일은 없습니다. 주朱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형은 나에게 친형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나에게 친형이 있더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느 ㄴ내 눈에 눈물이 가리어 무슨 말으 ㄹ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나던 해, 내가 상해로 달아났을 때입니다. 나보다 8년 연상인 형은 호강대학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학교로 찾아간 나를 데리고 YWCA 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 준 기억이 납니다. 나는 상해 시내에 방을 얻고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형은 주말이면 기숙사에서 나와서 나하고 영화 구경을 갔습니다. 그때 '글로리아 스완슨'이란 여배우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중국 음식점에 가서 저녁도 잘 사 먹었습니다. 육당의 <백팔번뇌百八煩惱>를 같이 읽은 것은 사천로에 있는 어떤 광동 음식점이었습니다. 형이 나보고 영화 구경하고 저녁 사 먹을 돈만 있으면 돈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된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대학에 있어서의 형은 특대생이었고 영자 신문 주간이요, 대학 토론회 때 학년 대표요, 마닐라 극동 올림픽에 중국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한 적도 있습니다. 형은 나의 이상적 인물이요, 그리고 모든 학생의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형의 앨범 첫 페이지에는 도산 선생의 사진이 있었고 그 밑에는 나의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형은 3·1운동 당시 등사판 신문 ≪신동아新東亞≫를 편집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나하고 방을 얻어 같이 살았습니다. 겨울 아침에 형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고 나는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추운 아침 물을 길러 가는 것이 힘이 든다고 나더러 불을 지피라고 그랬습니다. 이 무렵 노산鷺山, 청전靑田 같은 분이 늘 놀러 왔습니다. 당신이 가정을 갖게 되고 내가 상해로 다시 가게 될 때까지 몇 해 간을 이 하숙 저하숙으로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당신의 잘 알려진 작품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어느 부분은 나와 우리 엄마의 에피소드였습니다. 형이 상해 학생 시절에 쓴 <개밥> <인력거꾼> 같은 작품은 당신의 인도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형은 정에 치우치는 작가입니다. 수필 <미운 간호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은 몰인정을 가장 미워합니다.
내가 북격으로 형을 찾아갔을 때 북해공원에서 밤이 어두워 가는 것을 잊고 긴긴 이야기를 하였지요, 그때 조지프 콘래드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납니다.
형은 나에게 있어 테니슨의 '아더 헬름'과 같은 존재, 그대가 좋아하는 시구를 여기에 적습니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형은 한 중국 여동학女同學과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심餘心이라는 아호雅號를 지었습니다. 타고 남은 마음이라고.
========2009년 02월 14일 오후 3시 44분 옮겨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