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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흔적*;;* /금수 강산 ▦

소록도를 다녀와서...

청명한 5월의 석가탄신일, 소록도를 방문했다.

아이들의 역사문화체험학습의 인솔 차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소록도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고흥군에서 나오신 전문 해설사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한센병 환자들이 겪었을 아픔에 가슴이 메어져 왔다.

5월의 따가운 햇살아래 풀과 나무는 빛나고 있었지만 오히려 슬픔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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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실의 담: 이 출입문 안쪽으로 감옥같은 감금실이 있다.

 

 

▼감금실: 일제 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로서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이 곳에서 수용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고, 강제노역이나 온갖 가학에도 굴종케 하고,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무수히 이 곳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출감 시에는 예외없이 정관절제를 당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이 곳은 격리실 또는 보호실로 불리었으며, 1973년 이후 내부를 일부 개조하여 신체부자유자의 가정사로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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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부실과 강제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던 환자의 시: 이 건물은 감금실의 옆 건물로서, 한센병 환자가 죽게 되면 해부실에서 온갖 예리한 칼에 시신은 난자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의 환자들은 세상에 태어나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호흡의 멈춤에 의한 죽음, 해부당함으로써의 죽음, 그리고 화장. 해부실의 바로 옆 칸은 남자 환자들에 대해 강제로 정관절제수술이 이루어졌던 방이 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틀에 매어놓고 강제로 수술을 행했다고 한다.

 

 

 ▼한센병 환자들의 화장터 

 

 

▼ 4대 수호원장의 동상 터: 수호원장은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소록도에 재직한 일본인으로서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또한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1940년 8월 20일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는데 이 날을 기념하여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지정하고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였다. 이 원장은 환자들에게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으로 환자들의 불만을 사던 중 1942년 6월 20일 감사일 행사에서 환자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춘상은 당시 일제의 법원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으며 원장 동상은 태평양 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 되었다. 

         

 

 

 ▼소록도 중앙 공원의 솔송나무와 삼나무: 한센병 환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소록도 중앙공원은 일본인 원장의 지시에 의해 손가락이 없는 환자들이 팔에 호미를 묶어 조성한 곳으로서 환자들의 슬픔과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치가 출중한 나무들은 철책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며, 전문 평가사로부터 28억이라는 감정가를 받은 솔송나무와 바닥을 향해 굽어자라는 삼나무도 있다.  

 -솔송나무

 

 

   -삼나무: 이 삼나무가 왜 거꾸로 자라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공원의 일부

 

 

▼구라탑(求癩塔): 나병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라는 한센병 환자들의 소망이 담긴 탑 

 

 

▼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한하운은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 출생이다.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였다. 한하운은 1926년 초등학교인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내내 우등생이었으며 특히 음악과 미술에 자질을 보였다. 베이징대학에서 농학원을 졸업하고, 함경남도 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나병이 악화되어 그만두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된 바 있고, 1948년 월남하여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에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을 발표하여 등단한 이후. 나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문둥병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들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다음에서 검색한 소록도의 역사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 나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개원한 이래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 수용하기 위한 수용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수용되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마사토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강요, 불임시술 등의 인권침해와 불편을 당했다.

소록도 안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 자녀들이 강제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한센병 치료 및 연구, 요양 재활 등을 기본으로 하는 요양시설로 바뀌었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으로부터 과일 농사, 가축 사육 등의 기술을 익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소록도는 섬의 전체가 국유지로 일반적인 주민은 거주하지 않으며 대부분 섬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다. 또한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자이며,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병원의 직원 등 환자가 아닌 사람들이 거주하는 관사지대(소록리1번지)와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지대(소록리2번지)로 나뉘며 병사지대는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다니면서 섬주변을 둘러볼 수 있도록 길이 잘 닦여 있다. 우체국 도양읍 소록지소 등 관공서와 천주교회, 개신교쇠, 원불교당 등의 종교시설, 초등학교 분교 등 교육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2007년 9월 22일부터 5일 간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륙교인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으며, 2009년 3월 3일에 정식 개통하였다.

 이곳을 모델로 한 소설로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이 있다. 대략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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